[CM사례]국내 최초 Pertware 개발 표준화 코드 정립

작성자
admin
작성일
2003-09-17 15:16
조회
191

◎ 윤재호 본지 논설위원/KOPEC 상무


철도건설 CM사례---중
*소련 철도건설과 국내 사업관리 태동기

80년대 당시 국내사가 수주한 해외공사중 제일 큰 규모였던 이락북부철도공사가 고속철도경험이 전무한 한국건설업체에 의해 89년 성공리에 완공(FHO)했다는 것은 전 세계의 철도기술자들을 놀라게 했다.
90년 유지보수기간이 종료되어 이락정부에 철도시설물을 최종적으로 인계하던 중 본사의 긴급 일시 귀국지시로 서울본사에서 소련업무지원을 하게 됐고 그후 공교롭게 이락-쿠웨이트간 전쟁이 발발해 이락정부측과 심혈을 기울였던 이락북부철도공사의 후속공사였던 20억불이 넘는 이락남부철도공사수주를 놓쳤다는 점은 지금도 큰 아쉬움이 남아 있다.
이란-이락전쟁중 공사현장에 미사일이 떨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직원과 근로자가 합심하여 공사를 완공했다는 점이다.
귀국즉시 정주영회장께서 소련의 석탄광개발, 가스관개발, 철도개발 등을 담당하는 소련개발팀장으로서의 책무를 극비리에 명하고 일본을 거쳐 소련으로 가는 티켓을 주며 출장을 잘 다녀오라는 것이었다.
다음날 서울을 떠나 생애 처음 적대국이라 일컸던 소련땅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한 후 고려인의 안내로 중국국경과 접해있는 꽁꽁 얼어붙은 아무르강(흑룡강) 위를 거닐며 “아 이곳이 옛 고구려 땅이구나” 생각하니 감회가 깊었다. 다음날 시베리아 횡단열차(TSR)에 몸을 실고 장장 8시간동안 여행하여 이르츠크역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부터 소련철도청장의 안내로 군용헬기를 타고 철저한 보안속에서 북극 도시인 엘킨스코에까지 항공노선답사를 하며 시베리아 철도사업의 업무를 시작했다.
이동 중 헬기위에서 시베리아의 울창한 침엽수 사이사이로 설원 위를 여유롭게 걸어 다니던 시베리아 호랑이와 곰의 모습은 나를 잠시나마 원시의 시대로 인도했다.
이때 소련철도청장이 말해 준 것은 이 계획노선을 정회장 자신이 몇 일동안 헬기로 직접 답사하면서 설정했다는 것이다.
이 계획철도는 엘킨스코에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이르츠크역을 잇는 연장 280KM, 레일 75kg, 궤간이 155MM인 광궤였고, 부설목적은 엘킨스코에서 노천석탄 및 광석 등 지하자원을 채취하여 이를 열차로 엘킨스코에서 이르츠크역까지 운반하고 이를 시베리아횡단철도로 하바로프스크로 운송한 뒤, 다시 북한의 경원선을 통해 서울로 운반하는 세기의 운송작전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생각하면 우스운 것은 이락 출발시 영상 45도였고 시베리아 도착시 영하 45도였는데 90도란 온도차를 극복했던 그 당시의 나의 젊음은 아직도 멋있는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나는 소련정부에서 마련해준 엘킨스코에의 간이사무실에서 여장을 풀고 막 바로 통신망구축, 현지노선 답사계획, 지질조사계획, 항공 및 위성측량계획 등 사업계획을 수립한 후 보고서를 본사에 긴급히 타전하였다.
몇일 후 본사에서 파견된 직원들과 현지노선답사를 위해 그 당시 최신 측량장비였던 GPS 및 간단한 지질탐사기를 소련정부에서 제공한 짚차에 실고 측량과 토질시험을 착수해 나갔다.
가는 곳마다 툰트라(영구동토대)였고 눈덮인 설원과 차디찬 강물들을 스쳐가며 동토심도체크를 세심히 해 나갔다.
시베리아에서 철길을 부설하기 위해선 동토의 성질을 알아야 함으로 세계 제일의 틴다동토연구소를 방문해 노선이 지나는 각 지방의 지질자료를 참조해야 했다.
동토에는 동토혹(Perma Frost)이 있어 이를 잘못 건드리면 동토가 녹아 이들 지역이 삽시간에 호수로 바뀌어 큰 낭패를 본다.
따라서 동토위에 집을 지으려면 특수기술이 필요한데 그 기술을 개발한 점은 한민족의 또다른 자부심이 되었다.
만일 동토위에 이 공법에 의하지 않고 지으면 동토가 서서히 녹아 수장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덕분에 이때 동토분야관한 책을 많이 보아서 상당한 전문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노선답사후 수집한 현지자료들을 팩스로 일일이 서울에 송부해 설계자료로 활용할 수 있게 하였고, 본사에서 작성한 설계에 따라 인력, 장비, 자재 등을 작성하고 타당성 분석을 실시했다.
인원은 현지 고려인을 활용하고 장비는 이락에서 사용한 장비를 갖고 오기로 하였으며, 자재는 소련공산품을 쓰기로 하였다. 하지만 이락장비들은 열대에 맞게 제작된 것이라 영하 45도의 극한에서도 견딜 수 있도록 개조해야 했다.
철도장비인 기관차, 템핑장비, 발라스트 운반장비, 궤도운반장비, 레코딩카, 레일용접장비 등의 사양을 뒤적이며 주요 동원계획을 하나하나 확정 시켜나갔다.
그 다음 철도사업을 수행하기 위한 조직구성, 본사조직과 현장조직간 그리고 소련정부와 한국정부와의 대외업무 협조체계구축, 마스터스케줄작성, 각종 리스크에 대한 대책수립, 자금소요 및 조달계획, 향후 필요한 업무 등을 마무리 지어 시공에 문제가 없도록 준비해 나갔다.
노선답사시 시베리아원주민 야크츠크인을 만났는데 이들은 우리와 피부색, 생활습관 등 모든 것이 같았고, 민속박물관에서 옛 전시물을 보았을 때 고구려인 것과 특히 같았다. 이들은 이따금 옛 고구려의 비석에 대해 일러 주었는데 이 비석은 간악한 일본인들이 역사를 변조하기 위해 비석글씨를 정으로 모두 조은 뒤 모타르를 발라 그 자취를 없애 버려 비석의 내용을 알아 볼 수없었다.
현지인들이 자기들의 조상은 고구려였을 것이란 얘기를 하는 것을 듣고, 이따금 난 “시베리아 토착인, 몽고인, 북방일본인, 북미 인디언 등 이 모든 민족의 원천은 부여족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소련팀장시절, 철도는 물론 석탄광 개발과 GAS개발에 참여했을 때 정말 북방진출의 첨병으로서 자부심도 많이 가졌다.
사실 소련개발사업은 한-소간의 외교정상화조건으로 양국정부가 약속한 한-소 경제협력사업의 일환으로 착수됐으나 90년도 노태우정권과의 불화로 현대가 정치에 참여함으로서 소련개발사업이 정치판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업주체가 여러번 바뀌어 결국 정치희생물로서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그 많은 주요 북방자료가 사장되었음은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소련개발사업을 수행하면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은 어느 날 정회장이 집무실로 불러 부장이었던 날“이봐 윤이사! 앞으로는 철도가 세계물류의 주 운송수단이야. 철도사업본부 신설안을 작성해서 보고해!” 하시는 것이었다. 며칠 밤을 새워가며 사업계획을 작성하여 품의를 올렸으나 정치의 회오리속에서 중단됐었다.
그 때 신설을 강행했더라면 현대는 세계에서 보다 더 큰 건설회사로 우뚝 서있을 것이고 나 역시 아쉬운 과거사였다.
또한 소련 철도청직원 들과 현지답사중 잠시 레나강주변 노천온천장에서 밤새도록 빙설욕을 즐기던 일, 200년이 넘은 침엽수를 태워가면서 호수에서 바비큐를 만들던 일, 특히 여성기술국장 등 고위인사들의 친절한 매너와 소련인들의 남한에 대한 따뜻한 눈빛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따금 모스크바소재 철도청과 업무협의차 몇 일간 긴 열차여행을 한 후, 레느강변 호텔에서 철도청인사들과 정치얘기를 하던 때가 그랬고, 삼삼오오로 군인 마냥 떼를 지어 다닌 북한인들의 행렬이 그러했다.
소련개발사업이 중단된 후 91년 이명박회장이 “앞으로 건설관리가 중요하니 사업관리부를 창립하라”고 지시하여, 부서장을 맡으면서 사업관리와 인연을 맺었다.
10년 동안 사업관리부를 이끌면서 내 인생중 가장 많은 일들을 하여 아직도 그 시절은 후회가 없다. 93년 국내 최초로 윈도우환경의 공정관리 S/W인 Pertware개발하고 표준코드를 정립하였다.
95년에 창립한 CM간사회는 97년 CM협회를 창립하여 건설기술관리법에 건설사업관리규정을 제정했고, 99년 건설CALS협회를 창립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 외 94년 사내 대학원을 개설하여 CM석사를 배출하기 시작했고 95년도엔 전문가시스템(Expert System)의 개발을 착수하고 96년도에 국내 최초로 PMIS를 구축했다. 부서 설립시 3명을 3년뒤 140명이라는 막강한 조직으로 키웠으니 내 평생 이렇게 정열적으로 일해 본 것도 얼마 안 되는 예였다.
하지만 1998년 민간 SOC사업중 가장규모가 큰 인천국제공항철도건설공사에 사업관리도입을 위해 동분서주하여 성공하였는데, 이 일이 3년이 지난 훗날 나에게 가장 잊기 힘든 큰 악몽이 될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