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방 이야기 : 멸정(滅情) ~
젊었을 적부터 "이 진사"는 부인인 "여주 댁"을 끔찍이도 생각해,
우물에서 손수 물을 길어다가 부엌으로 날라다 주고...
동지 섣달이면 얼음장을 깨고 빨래하는 부인이 안쓰러워
개울 옆에 솥을 걸고 장작불을 지펴서 물을 데웠다.
봄이 되면 아내 "여주 댁"이 좋아하는
'곰취'를 뜯으러 깊은 산을 헤매고,
‘봉선화’ 모종을 구해다가
담 밑에 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장날이 되면 "이 진사"는 "여주 댁"이 좋아하는
'검은 깨엿'을 먼저 사서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여주 댁"은 동네 여인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단 하루라도 "여주 댁"처럼 살아봤으면 한이 없겠네.”
“여주 댁"은 무슨 복을 타고나서 저런 '서방'을 만났을꼬?!”
"여주 댁"도 "이 진사"를 끔찍이 사랑해서
봄이면 병아리를 서른 마리나 사서 정성껏 키워
"이 진사"의 밥상 위에 백숙을 올리고,
바깥 출입도 없이 남편 "이 진사"를 하늘처럼 받들었다.
"이 진사" 부부는 슬하의 3남 1녀 모두 혼례를 치루어 주고,
지금은 맏아들 내외와 함께 살면서
귀여운 손자와 손녀도 두었다.
살림살이는 넉넉하고, 속 썩이는 식솔도 없어,
"이 진사"는 오십 초반의 나이에도
얼굴에 주름 하나 잡히지 않고 맑았다.
친구들은 거의 모두가 젊은 첩을 얻었건만,
"이 진사"는 오로지 "여주 댁" 뿐이다.
"이 진사"는 오늘도 저녁상을 물리고,
장에 갔다가 사온 '검은 깨엿'을 품속에서 꺼내
"여주 댁" 손에 건네며, 다정하게 손을 잡았다.
며느리, 그리고 사위에다 손주까지 보았건만,
여전히 "이 진사" 부부는 금슬이 좋아 밤이 뜨겁다.
“한평생 서방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살아
소첩은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이제는 첩을 얻으셔도…” 하면,
"이 진사"는 그때마다 입맞춤으로
아내 "여주 댁"의 입을 막았다.
- - - 그러던 어느 날 - - -
외출하고 돌아온 "이 진사"는 밥맛이 없다며
저녁상을 두어 숟갈 뜨다 말더니,
그날 밤 잠을 못 자고 한숨만 쉬었다.
그러더니 이튿날부터는 사람이 달라졌다.
"여주 댁"이 찬모를 제쳐 놓고 정성껏 차려온 밥상을
간이 입에 맞지 않는다고 국그릇을 던져서
뜨거운 국물이 쏟아지는 바람에,
"여주 댁"은 팔에 화상을 입었다.
한평생 말다툼 한번 없었던 사이에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 점잖던 "이 진사"의 입에서 천박한 욕지거리가 예사로 튀어나왔다.
아내를 보고 “저 년을 데리고 한평생 살아온 내가 바보 천치지!”
한집에 사는 맏며느리 보기가 부끄러워
"여주 댁"은 홍당무가 되었다.
"이 진사"는 이제 잠도 사랑방에서 혼자 자더니,
어느 날에는
“첩 살림을 차렸으니 이젠 나 찾지 마시오!”
이 한 마디를 남기고는 집을 나가버렸다.
"여주 댁"은 눈물로 나날을 보내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이를 악다물고,
“그 놈의 영감탱이 눈앞에 안 보이니
속이 편하네!” 하며 생기를 찾았다.
그런데, 집을 나갔던 "이 진사"가 한 달 만에 돌아왔다.
손자 손녀들과 아들 내외가 맨발로 마당으로 뛰어가 반겼지만,
"여주 댁"은 방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 진사"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눈은 벌겋게 충혈이 되었고, 몸은 앙상하게 마른 채
얼굴빛마저 검게 변했고, 복부는 풍선처럼 솟아올랐다.
그러더니, 3일 만에 이승을 하직했다.
"이 진사"에게 정나미가 떨어져 있던 "여주 댁"은,
사십구 재 내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가장이 된 맏아들이 삼베 두건을 쓴 채
장을 보러 갔다 와서는
제 어미 방에 '검은 깨엿'을 놓고 갔다.
'검은 깨엿'을 한입 깨물다가 눈물이 쏟아져,
"여주 댁"은 보료 위에 엎어졌다.
봄이 되자,
맏아들이 '곰취'를 한 바구니 가득 따왔다.
그리고, '봉선화' 모종을 가져와 담 밑에 심었다.
"여주 댁"이 맏아들을 불러 앉혀놓고 다그쳤다.
그때까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던 맏아들이
마침내 사연을 털어놓았다.
“아버지께서는 의원으로부터, 불치의 '죽을 병'에
걸려서 얼마 못 살 것이라는 말을 들으시고는
어머니와의 情(정)을 떼려고, 어머니께
그렇게 모질게 대했던 겁니다."
"저에게 신신 당부를 하시더군요.
장에 가면 꼭 "검은 깨엿"을 사다 드리고,
봄이 되면 ‘곰취’를 따다 드리고,
담장 밑엔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꽃,
‘봉선화’를 심으라고…”
"여주 댁"의 대성통곡에 맏아들도 목이 메었다.